글/퍄 2016. 6. 5. 22:48






  카게야마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전해졌다. 다시 잠이 들기엔 옆쪽이 자꾸 신경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검푸른 방 안에서 사람이 꼼지락 거리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쿠니미.”

  “깼어?”

  쿠니미가 상체를 기울여온다.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왜 안 자고 있어.”

  “더워서.”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에어컨을 켜지.”

  “리모컨이 이쪽에 없어.”

  “찾으면 되잖아.”

  “…귀찮아. 어둡고.”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어이가 없어 대꾸해 줄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 깬 김에 에어컨 좀 켜줘.”

  “…너 진짜 짜증난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다. 어지간히 더운지 쿠니미는 이불을 발밑까지 다 내리고 있었다.

  “넌 부끄럽지도 않아?”

  협탁 아래 떨어진 속옷을 주워 입으며 핀잔주듯 말했다.

  “깜깜한데 뭐 어때. 그리고 너밖에 없는데.”

  카게야마는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두워서 다행이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카게야마는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리모컨을 찾아들고 에어컨을 켰다. 쿠니미의 손이 닿는 자리에 리모컨을 놔두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이제 곧 시원해질 거야. 자자.”

  돌아누운 카게야마의 뒤로 쿠니미가 몸을 붙여왔다. 옭아매듯 다리까지 척 올리는 자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썼다.

  “…덥다며 왜 자꾸 붙어.”

  “이제 시원해진다며.”

  쿠니미는 킥킥거리며 카게야마의 뒷목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야, 나 잘 거야.”

  “자. 누가 뭐래?”

  허리께를 연신 쓸어내리면서 잘도 입을 연다. 끙. 카게야마는 몸을 더 웅크렸지만 쿠니미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나 내일 연습 있어. 너도 내일 연습 있다며!”

  “장난이야.”

  넌 너무 진지하게 군다니까. 놀리는 것이 분명한 어조에 카게야마는 다시 짜증이 차올랐지만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행동에 얌전히 눈을 감았다.

  “잘 자.”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고는 곧 붙은 몸이 떨어져나갔다.

 


  카게야마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미 햇빛이 환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휴대폰부터 찾았다. 허리 위로 올려진 쿠니미의 팔을 떼어내고 휴대폰을 열었다. 아, 지각이다. 카게야마는 다급하게 쿠니미를 깨웠다.


  “쿠니미! 일어나. 늦었어.”

  쿠니미는 얼굴을 베개로 더 파묻을 뿐이었다.

  “빨리 일어나!”

  억지로 쿠니미의 몸을 일으켜 놓고 옷을 던져주었다.

  “나 씻을 테니까 너도 빨리 정신 차려, 알겠지?”

  급하게 세수를 하고 가방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을 때 쿠니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일어나라니까! 그리고 그거 내 옷이야 멍청아!”

  티셔츠를 벗기려 잡아당기자 쿠니미는 얼굴을 구겼다.

  “어제 한 걸로는 부족했어? 아침부터 이러게.”

  이 멍청이가.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거세게 티셔츠를 벗겨냈다.

  “아파. 살살 좀 해.”

  “네 티셔츠나 똑바로 찾아서 입어.”

  쿠니미는 아침에 약해서 하나하나 다 챙겨주지 않으면 연습이 끝날 때까지 집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쿠니미의 가방까지 다 챙긴 카게야마는 그의 손목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알람 네가 껐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하품하는 쿠니미의 어깨를 때린 후 카게야마는 먼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이 좀 가, 카게야마.”

  “네가 빨리 와.”

  불만스럽게 꿍얼대는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다가오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쿠니미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얘 연습은 제대로 하는 거야? 연습하다 자는 건 아니겠지. 공이라도 맞으면 안 되는데. 스스로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었다.

  

  길이 갈라지는 곳이 보였다.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그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쿠니미였다. 훌쩍 거리를 좁혀 다가온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귀에 바짝 입술을 붙이며 말했다.

  “오늘도 연습 끝나고 가도 돼?”

  들뜬 것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길 한복판에서 이러면 곤란한데. 그런 생각보다도 카게야마 역시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부모님 내일 오셔.”

  그럼 간다.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인 말을 뱉어놓고 카게야마는 재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좋으면 좋다고 하지. 솔직히 있는 그대로 말 못하는 게 카게야마다워 쿠니미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     *     *

 


  「 나 교문 앞 」

  

  문자를 받은 카게야마는 급하게 교문으로 달려갔다. 흰색 바지에 민트색 티셔츠를 입은 쿠니미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 옆을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쿠니미를 보며 떠들다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보였다. 쿠니미는 휴대폰을 보고 있어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꼭 카게야마의 시선을 느끼 것처럼 쿠니미가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연습 잘 했어?”

  “응. 늘 똑같지. 넌?”

  “나도. 지각해서 오늘 내가 뒷정리 했어.”

  뭐하다 늦었냐고 오이카와 선배가 얼마나 끈질기게 묻던지. 쿠니미는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여학생 무리는 쿠니미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불편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큰 길로 나와서야 겨우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매일 이래?”

  “뭐가?”

  “매일 이렇게 여자애들이 몰리냐고.”

  “…지금 누구 얘기 하는 거야?”

  “너.”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도 제법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카게야마는 잘 몰랐지만 킨다이치가 지나가는 말로 몇 번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새삼 지금에서야 그걸 느끼게 될 줄이야.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별로 상관없어.”

  “…왜?”

  인기 많으면 좋아하지 않나? 선물과 꽃을 잔뜩 받고 졸업하던 오이카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네가 있잖아.”

  카게야마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것을 지켜본 쿠니미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질투했어? 부끄러워?”

  “…시끄러워!”

  혼자 빨리 걸어가는 카게야마의 뒷목마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쿠니미는 갈수록 들뜨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쿠니미와 카게야마는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집 근처의 편의점에 들렀다. 도시락을 고르고 있을 때 편의점을 돌아다니던 쿠니미가 옆으로 와 물었다.

  

  “우리 콘돔 남았던가.”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라 카게야마는 들고 있던 도시락을 떨어뜨릴 뻔 했다. 다행히 음료수를 고르던 다른 손님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지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미쳤지 아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크게 말 안 했어.”

  “그래도 밖에서 그런 말 하지마.”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게야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아침처럼 가까이 다가와 “그래서 남았어?”라고 물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제 알았어?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에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짓궂은 면이 있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요즘은 좀, 여러 의미로 카게야마를 곤란하게 했다.


  계산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세상이 바뀐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편의점에 몇 분 있었다고 그 새 비가 와.”

  비를 싫어하는 쿠니미는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우산 살까?”

  “너희 집 가깝잖아 여기서.”

  돈 아까워. 그냥 뛰자. 쿠니미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뒷모습에서 또 다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편의점봉투를 가방에 집어넣고 그 뒤를 쫓았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비가 세차게 내려 카게야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둘 다 온통 젖어있었다. 쿠니미는 젖어서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게야마는 괜히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현관 바닥에 물이 잔뜩 고였다. 물을 닦을 생각에 심란해진 카게야마의 옆으로 쿠니미가 갑자기 다가왔다. 훅 끼치는 비 냄새와 함께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지나 머리 위로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에 살며시 눈을 뜨자 코앞에 쿠니미의 얼굴이 보였다. 쿠니미는 수건으로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있었다.


  “왜. 키스하는 줄 알았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답할 수가 없었다. 순간 정말로 그런 줄 알았으니까. 정적이 찾아왔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어깨와 얼굴 사이로 애매하게 시선을 돌렸다.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응시했다. 속눈썹이 젖은 것까지 보일 거리였다.

  “…다 젖었네.”

  쿠니미와 카게야마의 눈이 마주쳤다. 쿠니미가 속삭일 때마다 숨결이 닿았다.

  “이번에는 진짜 할 거야.”

  쿠니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축축한 입술이 맞닿고 뜨거운 혀가 섞인다. 쿠니미는 처음으로 우산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