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톨 2016. 6. 6. 20:37

 *네임버스 au

 




 

  “아키라, 입학식인데 못 가서 어떡하지?”

 

  다녀오겠습니다, 스치듯 던지고 현관으로 가는 등 뒤로 어머니가 따라붙는다. 한 쪽 어깨에만 걸쳐 매었던 가방을 양 어깨에 바로 매고 뒤를 돌아본다. 표정에 미안함과 걱정이 가득하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안심하라는 투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뗀다.

 

  “괜찮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천천히 안도감이 뒤섞이는 표정을 보며 출근 준비 하셔야죠, 덧붙인다. 으응, 그래, 그래야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새로 산 운동화가 눈이 부시게 희다. 주말에 외식이라도 하자.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네에,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신발에 발을 끼워 넣고 몸을 숙여 손으로 뒤축을 바로잡는다. 

 

  “다 컸네, 아키라.”

 

  손이 잠시 멈칫한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몸을 일으켜 다시 뒤를 돌아본다.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가며 하는 인사에 어머니는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입가에 단다. 잘 갔다 오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뒤로 하고 현관을 나선다. 빳빳한 청람색 교복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고등학교 첫 등교일이다.

 


*     *     *

 


  처음 ‘그것’에 관해 물었던 것은 다섯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 이게 뭐야?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왼쪽 손목을 내밀며 묻자 어머니는 작게 웃었다. 아키라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될 사람의 이름이야,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어머니에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는 엄마가 제일 소중한데? 그 말에 어머니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다정히 말해주었다.

 

  “아키라가 다 크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影山 飛雄

 

  밤하늘을 닮은 검푸른 색으로 손목에 새겨진 네 글자는, 어린 마음에 보기에도 참 예뻤다. 이름의 주인도 분명 예쁜 사람이겠지,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빨리 마주치고 싶은 마음에 매일 밤 달빛에 대고 손을 모아 나름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설레는 마음은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사람이 누구일 지 궁금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손을 씻다가 문득 왼쪽 손목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일곤 했다. 언제 만나게 될까, 궁금해도 기다리다 보면 나타나겠지, 하는 마음에 금세 다시 일상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을 하지도, 티를 내지도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기다림을 앓았다.

 

  하지만, 검푸른 빛깔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시선이 가 닿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손목의 이름을 닦아내고 싶었다.

 

  아직은 찬 초봄의 바람이 불어와 검은 머리를 헝클어낸다. 너는 내 것과 같은 교복에 감싸진 팔을 들어 머리를 매만진다. 정리하는 둥 마는 둥, 귀찮음이 묻어나는 서툰 손길에 웃음이 터질 것 같다. 심통이 난 것처럼 삐죽이는 입술은 엷은 분홍빛이다. 살짝 올라간 눈매 아래로, 손목의 이름보다 더 밤하늘을 닮은 색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른다. 

 

  이름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던 마음은, 이름의 주인이 너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잡아먹힌다. 고등학교의 첫 날, 등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너를 보며 나는 욕망과 공포에 동시에 휩싸인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분다. 재차 흐트러지는 머리칼보다 마음이 더 급히 엉킨다.

 

  운동장에서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줄곧 네게 시선을 고정한다. 아니, 내 시야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것이 희뿌옇게만 보인다. 두 줄 옆, 네 칸 앞.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로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끌어안고 싶은 등이라고, 입 맞추고 싶은 뒤통수라고 생각하다가, 이상하게 저릿해져오는 왼쪽 손목을 부여잡는다. 애써 글씨에서 눈을 돌린다. 네 이름이 아니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팔뚝까지 기어오른다. 순식간에 목을 조를 것 같은 생각에 고개를 털듯이 젓는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네가 아닐 리가 없다. 

 

  하지만 확인해 볼 용기는 차마 나지 않는다.

 


*     *     *

 


  너를 바라만 보는 날들의 연속이다. 나는 너에 관한 소소한 것들을 알게 된다. 점심시간이면 늘 자판기 앞에서 뚱한 표정을 짓다가 두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른다. 마시는 것은 늘 네모난 종이팩에 든 유제품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특히 구기 종목을 잘한다. 인맥은 그다지 넓지 않은 편이지만, 인사성이 바르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은 버릇인 듯싶다. 공부에는 딱히 흥미가 없어 보인다. 하굣길에 만두집에 들러 만두를 사가는 날도 적지 않다. 집 방향은 나와 겹치다가, 집에 다다르기 전에 마주치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갈라진다. 

 

  그런 것들은 알고 있으면서, 정작 이름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다.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겠지만, 여전히 겁이 난다. 마음에 뿌리를 내어 자리를 잡은 감정은 풋풋하면서도 사납다. 너를 보며 혼자 설레다가도, 네가 아니라면 어떡하지, 겁에 질린 목소리가 새어나오면 순식간에 덤벼들어 목을 물어뜯는다. 두려움을 목 뒤로 삼키면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한다.

 

  가끔, 가끔은 그 감정의 무게가 버티기 힘든 순간이 있다. 너를 바라볼수록 부풀며 무게를 더하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올 때, 나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찬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휘청 이는 마음을 식힌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겁쟁이였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감은 눈을 비집고 흐르는 투명한 혼란을 함께 흘려보낸다. 그렇게 얼굴을 씻고 세면대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치며 호흡을 고른다. 그러고는 소매로 대강 얼굴을 훔쳐내는 것이 일상인데.

 

  “저기, 이거…”

 

  손수건을 내미는 손이 익숙해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놀라고 만다.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왜, 네가 여기에? 미처 손수건을 받아들지도 못하고 멍하니 너를 바라보고만 있자, 네가 머쓱해진 듯 다른 쪽 손으로 뒷머리를 긁는다. 그냥, 닦을 거 없는 것 같길래. 입술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돌리는 네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손수건을 집어 든다.

 

  “…고마워.”

 

  흰 바탕에 끝부분만 푸른 실로 박음질이 되어 있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는다. 느릿하게 천을 누르며 물기를 닦아낸다. 처음 맡는 너의 향이 진하다. 시원한 바다 같기도, 따스한 햇살 같기도 한 향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밤하늘의 별빛을 닮았다. 꼭, 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구나,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생각을 하며 얼굴을 든다. 빨아서 돌려줄게, 말하려다가 멈칫한다. 돌려주려면, 이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한심하지만, 두려움은 혀끝을 잡아 누른다.

 

  “…돌려주지 않아도 돼.”

 

  네가 뱉는 말에 조금 놀란다. 그러나 이내 쌩 자리를 떠 버리는 너를 붙잡을 틈을 잡지 못한다. 나를 스쳐가는 네 귓가가 붉다. 나는 무언가로 머리를 꽝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기껏 차게 식힌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른다. 오른손에 쥐어진 손수건으로 왼쪽 손목을 감싸 쥐고 가쁘게 숨을 내쉰다. 

 

  걱정이 두 배로 늘었다. 

 


*     *     *

 


  네 몸 어딘가에 적혀 있을 너의 운명의 상대는 누구일까, 지울 수 없는 그 이름이 내가 아니라면 어떡하지. 똑같은 질문을 수십, 수백 번씩 떠올리며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선잠이 든다. 어렴풋한 꿈에는 밤하늘 아래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는 네가 나온다. 잔잔히 미소 짓는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하다가,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에 잠에서 깬다. 쎄하게 머릿속이 식는 것 같은 기분에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들어 이마에 댄다. 이상하게 열이 오르는 것도 같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보아도 빛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해도 채 뜨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갑고 뜨거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비척비척 걸어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다. 거울에 반사되는 내 얼굴이 초라하다. 눈싸움을 하듯 잠시간 흐릿한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오랫동안 않은 왼쪽 손목에 시선을 둔다. 낙인처럼 박혀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글자가 저릿하게 아프다. 환각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통증은 손목에 오는 것인지, 마음에 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물을 세게 틀고는 글자가 박힌 부분을 가져다 댄다. 기적처럼 흘러내려가기 바라는 마음에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에 수도꼭지를 잠근다. 선명한 네 글자를 보다가 입술을 깨문다.

 

  너도 나와 같은 심정으로, 네게 박힌 글자를 바라보고 있을까. 너도 나처럼 아파하고 있을까. 너도 나처럼 두려워하고 있을까. 너도 나처럼, 마음속에 이런 복잡한 감정을 키우고 있을까. 아, 너는 어쩌면 내 이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네게 짝지어진 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서 내게 이제껏 다가오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니면, 너도 차마 내 이름을 알아내려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너도 나처럼 겁을 내고만 있다면 좋을 텐데. 닥치는 대로 머릿속에 생각을 써내려간다. 여백 한 줄 없이 깨알 같은 글씨가 박힌다. 

 

  온갖 생각에 뒤틀리고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의지조차 갖지 못하는 새벽이다.

 


*     *     *

 


  “운명이란 건, 왜 있는 걸까요?”

 

  아침 식사를 하다, 아무렇지 않은 투로 슬쩍 질문을 던진다. 말끝이 조금 흔들렸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눈치 채지 못한 듯싶다. 으음, 글쎄. 고개까지 갸우뚱해가며 대답을 고르는 어머니를 보다가 이내 식사 그릇으로 고개를 돌린다. 식사 자리에서 묻기엔 난해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딱히 뭔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쩌면, 의외의 대답에 더 놀라버렸을지도 모른다.

 

  “운명이란 게, 사실 꼭 필요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쥐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 했지만, 애써 의연한 척 손에 힘을 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느릿하지만, 힘 있게 이어진다.

 

  “예를 들어서, 만약 아키라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이 아키라의 운명이든 아니든 소중한 건 여전하겠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멈추다가 이내 목소리를 낸다.

 

  “그 사람이 운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키라에게 소중해지지 못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 음. 운명이라는 건 결국 소중한 사람이 생기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그렇지 않을까, 아키라? 동의를 구하는 듯 물어오는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동요를 숨긴다. 방금 내 안의 감정에게 독일지, 약일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던져버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각하겠다며 나를 재촉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정신을 차린다. 의자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메고, 현관에 나가 신발을 신는다. 좋은 하루 보내렴, 먼저 인사를 건네는 어머니에게 허리를 숙여 답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

 

  빳빳한 교복 바지 주머니에 든 손수건이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는다.

 


*     *     *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한 번, 1학년 3반이라는 팻말을 한 번, 다시 손수건 한 번, 팻말 한 번… 한참을 그렇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바닥을 바라본다. 푸욱,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또 복잡하게 뒤엉킬 것 같은 머릿속을 비워낸다. 애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교실 안에 있는 지라도 확인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자 그럴 거면 도대체 왜 왔는지, 책망하는 목소리가 뒤따른다. 겁쟁이, 이러다가 점심시간 다 가겠다. 벌을 주듯 괜히 입술을 세게 깨문다.

 

  네가 내 운명이든 아니든, 너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마, 나도 너의 소중한 사람일 테니까.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나, 서로의 이름이 몸 어딘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이나 결국 기적 같은 일이다. 애써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간신히 용기를 내었는데. 정작 네 교실 앞에 와서 망설이고 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을까, 너를 알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깨물던 입술을 놓고 결단하듯 주먹을 꾸욱 쥔다.

 

  복도 창문을 통해 보니, 너는 창가에 혼자 앉아 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에 또 가슴이 뛰어, 애써 낸 용기가 무색해질 뻔 한다. 교실 안에 다른 아이들도 몇 없어 보여,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드르륵, 생각보다 큰 소리로 열린 문에 나도 모르게 흠칫하지만 다시 돌아보니 아무도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두근거림을 눌러 참으며 천천히 네게로 다가간다.

 

  “저기.”

 

  이름을 모르니 부를 말도 딱히 없다. 어색한 말투로 말을 건네니 네가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돌린다. 둥그렇게 커지는 눈이 사랑스럽다. 그 때처럼 붉게 물드는 네 귓가를 따라 내 마음도 함께 달아오르는 듯하다. 굳어버릴 것 같은 입술에 힘을 주어 말을 뗀다.

 

  “할 말이 있는데, 혹시 잠시 시간 좀 내 줄 수 있을까.”

 

  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다음은, 사실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학교 뒤편의 공터로 너를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하려고 했던 말은 이미 까마득하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뜬다. 내 앞에 네가 있다. 밤하늘을 닮은 네가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스러운 척 시선을 피하다가 문득 내 손에 잡힌 네 손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오른손으로 손수건을 건네며 바보같이 말끝을 흐린다.

 

  “정말 돌려줄 필요 없었는데.”

 

  그러면서도 양 손으로 손수건을 집어 들고는 조심스레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주저하다 꺼내는 말이, 이제 가도 될까, 하는 질문이다. 아, 안되는데. 너를 붙잡으려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결국 그토록 피하고 도망치던 질문을 던지고 만다.

 

  “이름이, 뭐야?”

 

  너는 빠르게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느닷없이 내 오른쪽 손목을 잡는다. 손바닥 펴 봐, 조용히 말하는 목소리에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손을 펴 보인다. 너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내 손바닥 위에 천천히 글씨를 써내려간다. 

 

  影山 飛雄

 

  “이렇게 쓰는, 카게야마 토비오야.”

 

  그러고는 내 손목을 놓는다. 놓아진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떨리는 손으로 느릿하게 왼쪽 교복 소매를 걷어 올린다. 밤하늘을 닮은 네 개의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너는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렇게 쓰는, 카게야마 토비오. 카게야마 토비오야.

 

  “너는…아키라. 쿠니미 아키라.”

 

  네가 이어가는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너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구나. 전혀 상상하지 못한, 연이은 충격들에 휩싸인 내 손목을 네가 가볍게 그러쥔다. 이리, 가까이 와 봐.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귀 뒤쪽을 내게 보인다. 짙은 흑색의 글자가 작게 박혀 있다. 글자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놀라움에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国見英 

 

  “이렇게 쓰는, 쿠니미 아키라. 맞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네 이름이 적힌 왼쪽 팔을 뻗어, 내 이름이 적힌 네 오른쪽 귀 뒤를 부드럽게 매만진다. 네가 가만히 입을 열어 중얼거린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엷은 진동이 되어, 네 피부를 타고 내 손끝에 와 닿는다. 

 

  “나는, 네가 나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을 줄 알고, 그냥 그게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뚝.

 

  다급한 입술이 네 목소리를 막아선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코끝이 묘하다. 나도 모르게 저질러버린 일에 스스로도 당황한다. 가만히 입술을 매만지다가, 네게 닿았던 순간이 되살아나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된다. 네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지 오래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이 말을 해도 괜찮은지 알지 못하지만, 괜찮지 않더라도 꼭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내 양 손으로 네 양 손을 붙잡고는, 조금 다급하게 입을 연다.

 

  “좋아해.”

 

  네가 내 운명이어서가 아니라, 네 이름이 내 손목에 있어서, 또 내 이름이 네 귓가에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너여서 좋아해. 다른 무엇도 상관하지 않아. 그냥, 그냥 너를 좋아해, 카게야마. 카게야마 토비오.

 

  네게 하는 것인지, 내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쏟아낸 말은 서툴기 그지없는 고백이다. 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둥그런 네 정수리만 보아도 미소가 지어지는 나는, 생각보다 네게 더 깊이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그렇게 대답 없이 멈춰있던 너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사랑스럽다. 네가 내게 눈을 맞춰온다. 네 눈동자는 여전히 밤하늘을 닮았다. 느릿하게, 예쁜 입술이 열리고, 나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나도, 좋아해.”

 

  나도, 네가 너라서 좋아, 쿠니미. 쿠니미 아키라.

 

  봄의 끝자락이, 예쁜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다.